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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빈소. 필자 제공


고교 나와 72년 ‘원풍 노동자’ 된 뒤 이름뿐인 노조를 민주노조로 탈바꿈 65개 소그룹 꾸려 노조 운영 활성화 노사합의로만 해고 가능하게 하는 “놀라운 단체협상 결과” 일궈내기도 원풍 노조 운영 방식, 타 노조에 확산 87년 전국 노동자 대투쟁 밑거름 돼 지난 8월24일, 정오가 막 지나 부음을 접하고 중얼거렸다. 가셨구나, 이제 편안하시겠네. 4개월을 중환자실에서 지내셨기에 놀라운 일이 아니었으나 기둥 하나가 무너진 듯 휘청해졌다. 나의 청년기에도 큰 영향을 준 분일 뿐 아니 초등학교 급식비 라 원풍모방 노조에 몸담았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 말하는 동료들 또한 그럴 것이다. 국회의원, 장관으로 일하실 때도 대명사처럼 ‘방지부장’이었던 방용석(1945~2025·8·24)은 고교를 나와 원풍모방 노동자가 된 1972년부터 타고난 기질을 발휘했다. 동료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는 회사의 부당함을 용납하지 못하면서 이름뿐이었던 노조 신용불량자조회 를 민주노조로 변신시키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면서부터다. 교선부장을 거쳐 전국섬유노조 원풍모방지부의 지부장을 맡는 동안 사쪽이나 정보기관의 어떤 회유에도 흔들리지 않는 지부장에게 신뢰가 커지는 만큼 노조의 조직력은 굳건해졌다. 조합원을 위한 사내 신협, 공동구매조합, 미용실, 목욕탕에 이어 자녀 장학금이 지급되는 등 복지혜택이 높아졌으며 노조 사무실에 양서 러쉬앤캐쉬 대출조건 가 채워지고 크리스찬 아카데미, 도시산업선교회, 재야 민주인사들과의 교류 등을 통한 조합원 교육이 매주 진행되었다.



필자인 장남수(오른쪽 여섯째) 작가 등이 1978년 추석 전날 서울 영등포구치소에서 석방된 뒤 마중나온 고인(오른쪽 다섯째)과 함께 걷는 모습.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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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개미, 모닥불 등 온갖 명칭의 65개 소그룹이 거의 매주 모임을 했고 소모임장, 기숙사 자치회, 대의원회, 상집회의 등 촘촘한 회의체계를 구성했다. 비로소 우리는 ‘공순’이가 아니라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노동자’임을 인식했고 자긍심이 솟아올랐다. 그 과정에서 방지부장은 ‘국가보위에 관한 퀸소액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구속이 되기도 했다. 1973년 공장이 부도 위기에 몰렸을 때는 우리나라 최초로 노조가 경영에 참여해서 회사를 도산 위기에서 구해내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풍모방은 공단 노동자들이 입사하고 싶어 하는 첫손가락에 꼽혔다. 쉽고 명징한 비유를 들어 교육하던 방지부장의 교육은 인기가 대단했다. 새내기 시절의 나도 이런 말들이 귀에 쏙 박혔다. “여러분, 사장이 전라도 사람이면 전라도 노동자 착취 안 하고 사장이 경상도 사람이면 경상도 노동자 착취하지 않습니까? 노동자는 어디에서 일하든 똑같으니 힘을 모아 연대해야 합니다.” 교육 내용을 실천이라도 하듯 나는 78년 3월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문제에 연대해 싸우다 타 사업장 노동자들과 함께 구속되었다. 동일방직, 삼원섬유, 남영나일론, 방림방적 등의 노동자 6명이 6개월 징역살이를 하고 78년 추석 전날 석방되었을 때 같이 징역살이한 동료들은 ‘당연히’ 해고되어 있었는데 나만 노동조합 행사에서 환영받으며 복직되었다. 원풍 노조가 단체협상을 통해 ‘노동자의 해고는 노사합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조항을 쟁취해 낸 덕분이었다. 이 조항 때문에 회사는 나를 해고하지 못했다. 78년도 원풍 노조의 놀라운 단체협약, 그 중심에 방용석이 있었다.



양승태 사법농단 항의집회에 참석한 고인. 필자 제공


동일방직, 콘트롤데이타, 와이에이치(YH), 반도상사 등 70년대 민주노조들이 ‘방지부장’을 크게 신뢰하며 연대했음도 기억한다. 방용석은 명료하고 뛰어난 전략가였다.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는 전략은 구체적이고 합리적이어서 공허하지 않았다. 한때는 ‘한국의 바웬사’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 시기 형형한 눈빛과 단단한 결기를 기억하는 나는 그때의 방지부장이 가장 빛났다고 느낀다. 당신도 스스로 그 시기를 ‘내 인생의 전성기’라고 했다. 1980년 광주항쟁의 엄혹한 시기에는 광주 희생자 돕기 모금을 해 470만원의 성금을 광주에 전달한 유일한 노동조합이었으나 이후 수배와 구금의 고초를 겪으며 방용석은 ‘국가 차원’에서 강제 해직당했다. 그 후 84년, 민주노조 협의체로 만든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협) 위원장을 맡게 된 뒤 운동의 방향을 두고 큰 갈등도 겪었다. 노조결성지원 등 현장을 중시하는 방용석을 두고 급진적 정치투쟁을 주창하던 과거의 한 혁명론자는 “방용석 가지고는 혁명 안 된다”고 매도했다. 비난의 언어는 소리가 커서 소란했지만, 방지부장은 묵묵히 노협 기관지 ‘민주노동’을 만들어 노동법, 노조 운영, 노조 간부의 자세 등등을 후배들에게 교육했다. 전설이 된 원풍모방 노조의 운영방식이나 단체협약 등은 전국 노동자들의 본보기가 되어 대우조선 등 여러 노조에서 소모임이 조직 활동의 근간이 되었다. 그렇게 방지부장이 거제 창원 태백 등 현장을 발이 닳도록 오가는 동안 87년 전국 노동자 대투쟁의 불꽃이 타올랐다. 정치인이 된 방지부장, 병든 노구로 광장에 앉아 촛불을 들던 방지부장에 대해선 지면의 한계로 접어두고 추억 한 장면을 떠올린다.



고인의 영정 사진. 필자 제공


15년쯤 전, 그의 생일에 가까운 사람들 10여명이 모였다. 그러나 이벤트성 대접을 극히 꺼리는 방지부장은 간곡한 요청에도 식당에 나타나지 않았다. 허식을 싫어하고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검소했지만 후배들에게 쓰는 돈은 아끼지 않으셨다. 마지막 여행이 되고만, 원풍동지회 세미나를 겸한 2019년 겨울의 속초, 그날 당신은 회를 사주겠다며 목돈을 내놓았고 우리는 영롱한 생선회에 소주를 곁들이며 즐거웠다. 지병인 파킨슨병이 깊어져 있던 터라 이런 자리 마지막일 수 있다고 짐작하셨는지 당신은 밤을 꼬박 지새우며 소주도 몇 잔 비운 후 잘 부르는 목청으로 조용필의 ‘꿈’을 불렀다.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고향 가는 먼 길 새처럼 훨훨 날아 부디 영면하시길…. 원풍동지회, 후배 장남수. 장남수/작가·전 원풍노조 조합원